밤의 다른 이름은 기다림

밤은 어둠보다 기다림으로 더 깊어진다.

방 안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어둠은 한꺼번에 내려온 것이 아니라, 방의 가장자리부터 천천히 스며들었다. 책상 위 머그컵의 그림자가 길어지고, 의자에 걸린 셔츠가 잠깐 낯선 어깨처럼 보였다. 창밖 건물들은 하나둘 불을 끄고 있었고, 맞은편 아파트 어느 층에서는 아직 TV 불빛이 작게 깜빡이고 있었다.

밤의 다른 이름은 기다림 장면 1

나는 침대 끝에 앉아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메시지 창에는 마지막 문장만 남아 있었다.

잘 들어갔어?

보낸 시간은 밤 10시 42분.

그 아래는 비어 있었다.

나는 화면을 한 번 쓸어올렸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몇 초 뒤 다시 집어 들었다. 그 짧은 사이에 세상이 바뀌었을 리 없는데도, 기다리는 남자는 늘 그런 식으로 조금씩 우스워진다.

바깥에서는 늦은 버스가 지나갔다. 젖은 도로 위로 헤드라이트가 길게 밀려갔다. 창문 위로 흘러가는 불빛이 방 안을 잠깐 스치고 사라졌다.

밤이 깊어지는 이유는 어둡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답장 하나.
돌아오지 않는 말.
쉽게 들지 않는 잠.
내일이면 조금은 괜찮아질 거라는 믿음.

낮에는 기다림도 바쁘게 위장했다. 회의가 있었고, 점심을 먹었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커피가 식기 전에 마셨고, 신호가 바뀌면 거리의 흐름에 맞춰 길을 건넜다.

기다림은 그 모든 움직임 사이에 숨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볼 때.

나는 내가 여전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밤이 되면 핑계들은 모두 물러났다. 시계 초침 소리가 또렷해지고, 냉장고가 낮게 우는 소리도 이상할 만큼 크게 들렸다. 휴대폰 화면은 어둠 속에서 지나치게 밝았고, 마음은 작은 진동 하나에도 먼저 달려갔다.

밤의 다른 이름은 기다림 장면 2

나는 주방으로 갔다.

찬물 대신 따뜻한 물을 마시고 싶어졌다. 전기포트의 버튼을 누르자 작은 불빛이 켜졌다. 물이 끓는 소리가 방 안을 천천히 채웠다. 오래전에 사두고 잊고 있던 차 티백을 꺼냈다. 뜨거운 물을 붓자 컵 안에서 희미한 갈색 구름이 피어났다.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자 손바닥이 따뜻해졌다.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내가 기다리는 것은 그녀의 답장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는 내가 괜찮아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을 봐도 심장이 먼저 뛰지 않기를.
어제의 말들이 더는 오늘 밤까지 따라오지 않기를.
마음속의 어떤 문장이 제 무게를 잃고 조금 가벼워지기를.

“그냥 요즘 좀 그래.”

그녀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었다.

밤의 다른 이름은 기다림 장면 3

카페에는 저녁의 어둠이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고, 창밖에는 비가 내렸다. 그녀는 젖은 우산을 의자 옆에 기대어두고, 식은 커피를 앞에 둔 채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냥 요즘 좀 그래.

설명처럼 들렸지만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 말. 그래서 더 오래 남는 말.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것이 목을 지나 천천히 내려갔다. 아주 작은 일인데도, 그 순간만큼은 내가 나를 조금 돌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나는 숨을 멈추고 화면을 보았다.

그녀였다.

“안 자지? 내일 아침 커피 마시자. 말은 안 해도 돼. 못 잔 얼굴로 와. 내가 네 맞은편에 앉아 있을게.”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

기다리던 답장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밤새 상상하던 말은 아니었다. 그녀가 설명해주기를 바랐고, 미안하다고 말해주기를 바랐고, 어쩌면 모든 것이 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는지도 몰랐다.

다만 그녀는 내 앞에 앉아 있겠다고 했다.

그 말은 대단한 위로가 아니어서 더 오래 남았다.

나는 답장을 썼다.

“응. 나 갈게.”

전송 버튼을 누르자 작은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방 밖으로 나가지 못했지만, 내 안에서는 꽤 멀리까지 갔다.

나는 창가로 다가갔다.

유리창에는 내 얼굴이 비쳤다. 낮에는 괜찮은 척하느라 보지 못한 표정이 밤이 되자 드러나 있었다. 조금 지친 얼굴. 조금 비어 있는 눈. 아직 아무것도 완전히 내려놓지 못한 남자의 입술.

밤의 다른 이름은 기다림 장면 4

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기대었다.

차가웠다.

하지만 손에 든 컵은 따뜻했다.

나는 그 차가움과 따뜻함 사이에 서 있었다. 어쩌면 지금의 나는 딱 그만큼이었다. 마음 한쪽은 여전히 서늘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주 작은 온기가 식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었다.

밤은 하루의 끝이 아니었다.

밤은 끝난 일들이 다시 문 앞에 서는 시간이었다. 지나갔다고 믿었던 말들, 잊었다고 생각한 표정들, 낮 동안 아무렇지 않은 척 눌러둔 마음들이 조용히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나를 해치기 위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밤은 내가 놓친 나를 다시 데려오는 시간인지도 몰랐다. 서운함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그리움을 조금 덜 날카롭게 만들고, 말하지 못한 말들을 끝내 말하지 않아도 되는 쪽으로 식혀주는 시간.

나는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메시지 창을 닫지 못하고 한참 바라보았다.

한참 뒤에야 나는 화면을 넘겼다. 화면을 끄자 방 안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다. 어둠은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잠시 부드럽게 덮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기다린다고 해서 모든 것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답장이 온다고 해서 모든 말이 설명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끝내 어떤 마음은 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떤 말은 영영 설명되지 않은 채 남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설명되지 않는 밤에도 차는 따뜻할 수 있었다.
흔들리는 밤에도 그녀는 안부를 물어올 수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도 나는 나를 조금 덜 미워할 수 있었다.

한 시가 지나고, 두 시가 지나고, 세 시가 지나갔다.

잠들지 못했지만 완전히 깨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생각은 끊어졌다 이어졌고, 기억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방 안의 어둠이 조금 옅어졌다.

밤의 다른 이름은 기다림 장면 5

커튼 틈으로 새벽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새벽은 아무것도 한꺼번에 해결해주지 않았다. 휴대폰은 한동안 조용했고, 어제의 말들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새벽은 조용히 창가를 만졌다.

그 긴 시간을 지나왔다는 증거처럼.
기다림이 나를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못했다는 듯이.

나는 휴대폰을 보았다.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하나 더 와 있었다.

“잠이 안 오는 밤은 혼자 두면 너무 길어져. 그러니까 내일은 같이 짧게 만들자.”

나는 그 문장을 읽고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창문을 조금 열자 차가운 새벽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멀리서 첫 버스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의 하루도, 아주 천천히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밤의 다른 이름은 기다림이라고.

어떤 기다림은 돌아오지 않는 말을 붙잡는 일이지만, 어떤 기다림은 이미 내 곁에 와 있는 온기를 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고.

그리고 그 기다림의 다른 이름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을 견디면서도
이미 와 있는 다정함을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이라고.

밤의 다른 이름은 기다림 장면 6

나는 밤을 지나왔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더라도, 빛은 결국 창가에 닿았다.